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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찌질

기사승인 2019.09.12  09: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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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날 늦은 오후 혹은 늦지 않은 밤.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구멍가게 앞에 놓인 평상 (파라솔 아니다)에는 빈병 서너개와 절반쯤 남아있는 소주병을 앞에 둔 그 사람이 있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빨리한다. 마치 바쁜일이 있는 것처럼. 잡히면 족히 30분(매우 긍정적 예측이다)은 각오해야 한다. 그 사람은 동네의 누구에게는 선배이고 다른 누구에게는 형님이며 다른 누구에게는 아저씨이며 또 다른 누구에게는 삼촌으로 불린다.

안부를 묻는 간단하면서 의례적인 대화 이후에 말이 끊긴다. 이 침묵은 앞으로 고요가 이어지고 잔에 소주를 붓는 소리, 그동안 들리지 않았던 자동차 소리가 ‘이렇게 컸었나’라고 느끼는 시간이 계속 된다는 예고가 절대 아니다. 누구에게는 선배이고 다른 누구에게는 형님이며 다른 누구에게는 아저씨이며 또 다른 누구에게는 삼촌으로 불리는 저 사람의 성대 안쪽에는 앞으로 휘청거리면서도 끊임없이 이어질 말들이 차곡차곡 포개진채 압축돼 있다. 소주를 단숨에 털어넣지 않고 입술을 적시듯 조금만 묻히는 저 동작을 나는 안다. 무엇의 전조인지를.

“아 그놈 학교 다닐 때는 내 가방들고 다녔다”
“조모 그놈은 강의실 어느 구석에 박혀 있었는지 아무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IMF만 아니었으면 내가 지금 여기에 있지도 않았다”

술푸념, 넋두리, 하소연…… 그 행위를 무엇이라고 표현하든 다 맞다. 구멍가게 앞 그 술푸념, 넋두리, 하소연을 동네의 후배도, 선배도, 동생도, 조카도 심지어는 오촌당숙 아주머니도,교회 누나(지금은 누구의 어머니로 변한)도 피해가지 못했다. 개그맨 정형돈이 “어느 동네든 흙먹는 아이 한명은 있었다”고 했던가. 그랬다. 어느 동네나 어느 여름밤 풍경을 완성하는 구성처럼 이런 선배, 후배, 삼촌, 조카, 아저씨(각 단어 앞에는 ‘누구에게는’을 붙인다)가 있었다.

원희룡 지사가 누구인가. 제1회 대입 학력고사 수석. 서울대 법대 수석 입학, 사법연수원 5등, 국회의원 3선(그것도 수도권에서). 한나라당 최고의원 경선에서 박근혜에 이어 2등, 최연소 당 최고위원, 국회 외통위원장, 한나라당 사무총장, 공첨심사위원장… 누가 뭐래도 또래 중에서 선두로 내달렸다.

서울대 법대 82학번 동기인 조국 후보(당시에)도 나름대로 잘 나갔다고 하지만, 원 지사에 비하면 일천하다(특히 정치 경력이). 고작 민정수석 경력이 전부 아닌가. 응시했든 안했든 사법고시 합격도 못했지 않은가.

원희룡 지사는 조국 후보에게 “동시대의 386세대를 더는 욕보이지 말고 부끄러운 줄 알고 이쯤에서 그만둬야 한다” “… 현재까지 보여준 모습을 보고 법무부 장관으로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독설이다. “친구”라고 부르긴 했지만 낱말이 가진 본래의 뜻보다는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의 친구나, 다른 사람을 폄하하는 투로(가령 술집에서 시비가 붙었을때) ’어 이 친구 봐라(끝을 올려야 한다)’ 느낌이다. “형식적인 장관이야 되겠지만, 그것이야말로 정권의 종말을 앞당기는 역풍이 될 것이다. 확신을 갖고 말한다”는 부분에서는 저주까지 느껴진다. 아무리 양보해도 친구한테 하는 말로는 들리지 않는다.

원희룡 지사에게서는 동네의 누구에게는 선배이고 다른 누구에게는 형님이며 다른 누구에게는 아저씨이며 또 다른 누구에게는 삼촌으로 불리며 구멍가게 앞 평상을 점령했던 그 분의 냄새가 난다. 아주 진하게.  

강민식 기자 kminsik@leisuretimes.co.kr

<저작권자 © 제주레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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